토크 홈
쉬는시간
애매한 인간
서점겸카페 사장님의 하루

단골손님과 68분의 통화

2023.01.07


고백하건대 남편을 비롯한 어떠한 가족과도 이렇게 길게 통화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오늘 우리 서점의 단골손님과 무려 68분간 통화를 했다. 1시간이 넘어가는 통화는 사람의 마음을 발가벗기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보다.


주말에 각자 뭐 하고 놀았는지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하소연으로 이어지는 통화는 조금 낯설지만 새롭고, 이내 마음에 스며드는 따뜻함으로 노곤해진다.


내 마음을 터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막상 이야기하다 보니 술술 풀어졌다. 마음의 주머니가 너무 버거워 조금은 풀어지길 바랐나 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나왔나 보다. 


 🏯

이번 주 주말에 독서 모임 멤버 4명과 함께 서울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이라는 책을 읽은 김에 궁 투어를 가는 문학기행이었다.

서울의 지리를 모르는 나는 잠자코 멤버들을 따라다녔는데,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다 익숙한 것이 아닌가?

서울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전 직장의 건물이 시작이었다. 이어 시청광장과 덕수궁, 윤동주문학관과 청운 문학도서관, 창덕궁,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길은 늘 다녔던 출장길이었다.


서울시청으로 수십 번 회의하러 갔으면서도 시청 바로 옆이 덕수궁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몰랐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 번 들렀어도, 전시를 둘러볼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늘 목표한 장소에 가기 급급해 주변을 둘러보고 여유를 가지는 것마저도 하지 못했다.


*


지난날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던 거지?

무엇이 그리 바쁘고, 무슨 일이 그리 막중했기에 여유가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난날과 달리 지금의 나는 다를까?

내게 주어진 순간을 분명 즐기면서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후회되는 직장인의 삶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점에서의 지난 4년의 세월이 눈앞에 스친다. 독서 모임을 3년간 무료로 운영하다가 이제야 유료로 전환했는데 손님들이 대거 이탈한 '탈퇴 행진의 날'도 기록되어있다. 


📚️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고는 내게 돈 아꼈다고 자랑하는 손님도 있었지. 월세를 못 내서 은행을 전전하며 사업자 자금 대출받은 날은 코끝이 시렸다.


"이제 서점 장사 잘되는 것 같은데, 독서 모임 무료로 하고 자선도 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는 가난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현실이 기막혔다.

"서점도 사업인데 너무 바보같이 운영하는 거 아입니까"라는 구수한 사투리가 휴대전화 건너에서 들려온다.


그네의 목소리에는 염려와 애정이 묻어있다. 나를 대신한 그녀의 분노와 한숨이, 나를 되레 웃게 만든다. 




가을은 소리 내어 울어보라는 기회를 주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 굴을 저만치 파고 내려가도 괜찮다.

암울하고 힘든 순간을 계속 꺼내고 곱씹어도 괜찮다. 한없이 가라앉아 이내 침전하여도 괜찮다. 무너져 내려도 괜찮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더 처절히 자신의 마음을 내부셔라! 그러다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어라.


그렇게 탈력감을 느끼고 나면, 우리는 이상하게도 다음날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

68분의 통화로 4년의 세월을 오간다.

사람은 어째서 좋았던 순간보다 힘들었던 시간을 더 짙게 기억하는 걸까. 매 순간 성실히 삶을 직면해왔기에 힘든 순간이 선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 출장길에서 외로움이라고는 느끼지 못했던 그 순간이 사실은 '외로움'이라고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지난날의 미련을 단 1박 2일의 여행으로 모두 보상받는다. 슬프고 외롭고 분노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사람들로 인해 함께 웃고 떠들었던 찰나도 있다.


그런 찰나들이 모여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은 마음의 힘이 된다.


아아,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게 소중한 인연을 몰아주는 이 서점을 포기하려야 할 수가 없다.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알아가고,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려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경애의 마음, 김경희





📚 애매한 인간의 다른 글 보기





댓글 0
최신순
오래된순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