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업
외식경영 및 벤치마킹 전문가

더진국 손석우 대표 “그러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고.”

2023.12.22


<더진국> 손석우 대표

"그러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고."

얼굴에 쇳가루가 잔뜩 앉아 눈을 뜰 수가 없다. 온몸은 먼지투성이에 사방은 피선과 철강으로 덮여있고 폐품은 하늘 높이까지 쌓여있다. 17년 전 여름, 손석우 대표는 3500평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물상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열 손가락만으론 다 셀 수 없을 만큼 계속되는 실패, 기대할 만하면 생기는 변수로 몸과 마음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진흙탕 안에서 맴돌던 시간만 30여 년. 그렇게 길고 긴 레이스 끝에 찾은 종착지는 <더진국>, 국밥 브랜드다. 평범한 국밥집을 대규모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확장하며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고단했던 그의 인생을 열어보면 정답 비슷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황해원의 식당 운영 인사이트

만인이 사랑하는 명품국밥

<더진국>의 시작은 2011년 여름이다. 경기도 성남에 32평 매장을 열었다. 수육국밥과 순대국밥을 중심으로 보쌈과 전골까지 구성해 팔았다. 깔끔한 살코기 위주의 국밥, 시원하게 넘어가는 깍두기 맛을 잘 잡아 성별 연령 상관없이 많이들 찾아왔다. 그해 직영 매장을 두 곳 더 열었다.

 

‘국밥집’ 하면 으레 2대, 3대가 이어가는 유서 깊은 집이거나 허름한 노포식당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더진국>은 국밥으로 젊은 층을 공략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 정통의 버거 프랜차이즈처럼 누구나 간편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깔끔한 일상식 국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식당 일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더진국> 매장을 오픈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예비 점주들에게 손 대표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이다. 본사 직원들도 처음엔 그런 손 대표를 답답하게 생각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같은 입장, 같은 마음으로 점주 상담을 한단다.

 

손 대표는 사업 실패 앞에서 가진 걸 다 잃고 돈도 사람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의 고독과 상실감을 잘 알고 있다.


황해원의 식당 운영 인사이트

4억 원 빚, 온 가족 야반도주에 고물상 허드렛일까지…진흙탕 같았던 30년

그는 늘 가난했다. 서울 태생에 자란 건 부산, 부친의 사업 부도로 다섯 번이나 지역을 옮겨 다녔다. 한밤중 자다 일어나 밤 열차를 타고 새벽까지 달렸던 적도 있다. 야반도주였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통에 그에겐 유년시절의 추억도, 흔한 죽마고우도 없다. 장래희망이나 꿈 같은 것도 없었다. 온 가족이 흩어진 통에 어릴 땐 집 근처 작은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는데 그때 잠시 목사님이 되면 어떨까 생각한 적은 있다. 목사님이 되면 교회 밥은 평생 맘 편히 먹을 수 있으니까.

 

2001년 군 제대 후 판교에 있는 60평짜리 매장을 얻었다. 부친이 5년간 임대했던 자리였다. 고깃집에 한정식 코스를 접목한 한식당을 오픈하려고 준비하다 하루 전날 엎었다. 메뉴 전체를 담당했던 조리장이 전날 술을 마시고는 다음 날까지 말썽을 부렸다.

한동안 한식 조리장을 구하기 위해 구인 광고를 올리고 이리저리 수소문해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외식업이 처음인 데다 주방일과 요리에는 더더욱 문외한이었던 손 대표는 앉은 자리에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600만 원어치의 재료를 하루아침에 날렸다.

 

얼마 후 동네 주민의 추천으로 일식집을 열었다. 일식당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자문을 구해 룸 7개를 만들고 회와 초밥을 팔았다. 근처 한국도로공사 본사를 비롯한 기업들이 몇 있어 법인카드를 사용하는 단체회식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루 평균 300만 원 이상 매출을 유지할 만큼 장사가 잘 됐다. 그러나 순수 원재료비만 50% 이상, 일식 전문 조리장 6명을 운용하는데 들어가는 인건비와 월세, 기타 고정비까지 더하니 순익이 늘 아쉬웠다. 게다가 법인카드 접대비 상한제도가 생기면서 단체회식 고객이 절반 이하로 줄어 한동안 적자를 보다 결국 문을 닫았다.

이후 한정식 전문점, 황태요리 전문점, 대나무통밥 전문점, 등갈비 전문점, 홍합밥 전문점 등 업종을 여러 번 바꿔가며 운영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임대료 100만 원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결국 건물주에게 쫓겨나듯 매장을 넘기고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사업이 또 한 번 부도가 났다. 내 앞으로 4억 원의 빚이 생겼다. 무일푼으로 쫓겨난 상태라 실감도 안 났다. 그런데 죽지 않고서야 어쨌든 사는 동안 갚아야 할 돈 아닌가. 죽기 살기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본가에 맡기고 3500평 규모의 고물상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이 화장실처럼 사용하는 창고 한편에 자리를 만들어 생활했다. 아침에 눈 뜨면 전선 벗기는 작업부터 했다. 구리나 철통 3~4톤씩 들어오면 무게를 늘리기 위해 저녁 내내 흙을 붓고 절반으로 찌그러뜨려 창고에 쌓았다.

 

“고물상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전쟁처럼 일하고 서로를 헐뜯고 무시한다. 온갖 인격 모독에 가슴에 구멍이 나는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쇳가루와 먼지투성이에 폐품에서 나는 악취까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잠깐 눈 붙이려고 창고로 가면 대소변 냄새가 여기저기서 났다. 사람의 삶이 아닌 것 같아 밤새 울었다.”

 

살기 위해 악에 받쳐 일했고 4년 만에 4억 원의 빚을 다 갚았다.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중간 관리자급까지 올라가면서 이제 좀 승승장구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총 책임자에게 고물상을 나가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폐한 환경에서 죽을 힘 다해 살아남았건만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다니.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 9개월간 화물차를 운전하며 고물과 파지를 팔러 다녔다.

 

“얼굴이 시커메지면서 인상도 투박하고 어둡게 변하니 그때 가족도 나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하루는 친동생이 찾아와 8평짜리 돈가스집을 오픈했으니 형이 대신 맡아 달라고 하더라. 고생만 하는 내가 안쓰러워서였다. 그 길로 동생이 운영하는 돈가스집으로 갔다.”

 

돈가스와 쫄면을 한 접시에 담아내는 ‘돈쫄’ 메뉴를 만들어 팔았다. 갑자기 대박이 났다. 매장 앞은 매일 대기 손님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테이블이 4개뿐이어서인지 아무리 회전이 빨라도 재료비와 기타 고정비를 제하면 늘 남는 게 없었다.

 

“음식 장사에 대한 감이 아예 없진 않은 것 같은데, 막상 운영하면 항상 적자였고 고전했다.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니 자존감도 무너지고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과 열등감까지 생겼다. 결혼반지와 목걸이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이 돼서야 동생과 상의 후 매장을 접었다. 무얼 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보다 이제 와서 뭘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자괴감만 들었다.”

 

수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고물상에서 일할 때 그가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간혹 고물상에 개나 고양이를 팔고 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날은 영락없이 ‘개 잡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이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까지도 힘들게 한다네요. 억척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손석우 대표가 어떻게 <더진국>으로 재기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 편에서 이어 소개하겠습니다.


다음 편 놓치지 않고 읽고 싶다면?






댓글 6
최신순
오래된순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