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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 인문학 전문가

산나물인가? '풀때기'인가?

2022.06.23



산나물인가?
'풀때기'인가?



📒 30초 미리읽기

◾ 조선시대 산나물 브로맨스의 주인공은 누구? ◾ 선조들이 귀히 여겼던 나물이 지금은 '풀때기'로... ◾ 아무도 몰랐던 잡채의 주인공, 당면이 아니라 산나물?




산나물과 시를 선물로,
남자들의 브로맨스


나물, 산나물을 이야기하면 늘 마음속에 한 폭의 자그마한 수채화가 떠오른다. 아름답고, 그립고, 아련하다.

조선 초기의 시()부터 한 수.


🌸 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
모락모락 아지랑이 아른거리네
지난밤 장단(長湍)에 비 내렸는지
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


‘광주리에 가득 찬 고운 봄빛’은 시와 나물
이다. 이 시의 제목은 조금 길다.

“장단 유 선생이 시와 산채를 보내와
운을 빌려 감사하다”


장단 사는 유씨 성의 벗이 산나물과 시를 보냈으니, 그 시의 운을 빌어 자신도 시를 남겼다는 뜻이다. 나물과 시를 선물로 보낸 이는 ‘장단 사는 유 선생’이다. 받은 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송당 조준으로, 당대의 실력자다.

두 사람은 서로 그리워하지만, 막상 만나기는 쉽지 않다. 손에 빤히 잡히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쉬 만나기 힘들다. 지난밤에 장단 지방에 비가 내렸는지 유독 녹음이 짙다. 유 선생의 집이 어디쯤인지 쉬 알 수 있다. 장단은 한양도성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다. 오늘날 파주와 맞붙은 곳이다. 가까이 있지만, 쉬 만날 수는 없다. 그저 시와 산나물 선물을 주고받으며 먼 곳에서 그리워한다.

이 시를 읽으면 늘 아련한 그리움이 솟아오르고, 더불어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 시를 주고받았을 무렵, 송당 조준의 나이는 이미 환갑 언저리였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 남자와 남자끼리 이토록 애잔한 그리움, 아련함,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었다니. 잘 나가는 중앙부처의 고급 관료에게 시와 산나물 선물이라니. 이 역시 참 아련타. 지금은 보기 드문 ‘브로맨스’인 셈이다.

궁금한 부분은 또 있다. 시와 산나물이라고 했다.

어떤 산나물이었을까? 🙄
두릅일까, 어수리일까, 머윗대일까?




불가의 오신채는 엉터리다


우리 선조들은 나물을 귀하게 여겼다. 이른 봄의 산나물 선물은 연례적인 행사였다. 이른 봄이면 궁궐에서 국왕이 신하들에게 나물 선물을 내리기도 하고, 신하들이 왕에게 나물을 선물로 진상하기도 했다. 유 선생과 송당만 산나물 선물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 민간에도 널리 퍼져있던, 이른 봄 풍습 중 하나였다.

흔히 불가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채소라고 해서 오신채(五辛菜)를 말한다.

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를 든다.
엉터리다.




<삼국유사>에 근거를 둔 단군신화의 마늘은 달래다. 불가의 오신채는 달래와 마늘을 더불어 손꼽았다. 마늘은 대산(大蒜)이고, 달래는 소산(小蒜)이다. 마늘은 큰 마늘(달래)이고 달래는 작은 마늘(달래)이라는 뜻이다. 마늘의 한반도 전래는 고려 말기라는 설도 있다. 더러는 조선 초, 중기 마늘이 한반도에 전래하였다고 한다.

불가에서 금하는 오신채가,
불교가 흥했던 고려 시대에도 있었을까?
마늘이 없었던 시절, 무엇을 오신채로 삼았을까?


‘흥거’도 오리무중이다. 중앙아시아 혹은 인도, 아랍권의 향신료, 우리의 무릇이 곧 흥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 게다가 한반도에서는 아는 이도 드문 채소류를 굳이 금하는 식재료로 삼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식물의 뿌리 부분에서 추출하는 기름 성분이라는 설도 있다). 흥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근거 없는 추측만 있을 뿐, 믿고 참고할 만한 주장도 없다.




사라져버린 나물 문화


조선 시대 기록들을 뒤져보면 불가에서 금하는 오신채 대신 산나물, 들나물 모둠인 ‘오신채(五辛菜)’ ‘오신반(五辛盤)’이 자주 나타난다.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는 정조대왕의 <홍재전서>에 중국 측 자료로 한번 소개되지만, 나물 선물 오신채, 오신반은 조선 시대 기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오신채는 ‘매운맛의 다섯 가지 나물’이다. 오신채는 움파, 산갓, 당귀 싹, 미나리 싹, 무 싹 등이다. 모두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산나물, 들나물이다. 이중 산갓은 널리 먹지 않지만, 나머지는 지금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산나물, 들나물이다. 

음식 만드는 이들이 곧잘 내놓는 음식이 삼색나물, 오색나물 등이다. 




고사리, 무채 볶음, 도라지, 시금치, 콩나물

이 중 세 가지를 모아서 내놓는다. 그러고는 삼색 나물이라고 이름 붙인다. 대단한 것 없다. 30~40년 전 제사를 모셨던 집에서는 누구나 그 정도 나물은 내놓았다. 지금도 제사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물이다. 그 나물들을 뜨거운 밥 위에 올리고, 재래 간장을 얹은 다음 비비면 ‘간장 나물 비빔밥’이다. 색깔을 낸답시고 당근을 얹는 일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당귀, 미나리, 무 등은 모두 새싹으로 먹는다. 다 자란 것과 새싹은 향과 맛이 다르다. 우리 선조들은 그걸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움파는 겨울을 지난 파를 이른다. 대궁이 노랗다. 이 역시 파의 새순이다. 나물을 모두 같다고 여기지 않았다. 무라도 무가 있고, 무청이 있고 그중에서도 무싹을 각별히 구별했다는 뜻이다. 음식을 만지는 이들은 무의 푸른 부분과 흰 부분의 맛이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여름 무와 겨울을 넘기는 저장 무의 맛이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렇듯 한반도는 나물의 천국이었다. 굳이 산나물, 들나물을 가르지 않고 모든 나물은 흔하지만, 귀하게 여기고, 세심하게 갈라서 사용하고, 각자의 독특한 향과 맛을 살렸다. 오늘날 나물 음식처럼 모두가 달고, 맛있고, 감칠맛 나게 만들지 않았다. ‘나물 문화’는 우리 시대에 오히려 퇴보했다. 양은 많은데 고유의 향과 맛은 잃어버렸다. 풍요로운 시대의 서글픈 가난함이다. 우리는 다양한 산나물, 나물 문화를 잃어버렸다.




산나물이 무너진 이유


나물은 생채(生菜), 숙채(熟菜), 초채(醋菜)로 나눴다.

생채는 생나물
숙채는 익힌 나물
초채는 삭힌 나물이다.


초채는 신맛이 난다. 오늘날 장아찌나 초절임 채소 등이 초채에 속한다. 그까짓 몇몇 채소, 과일 절임을 피클이라 부르며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같은 나물이라도 생채, 숙채, 초채에 따라 맛이 다르다.

다섯 가지 나물을 쟁반에 얹으면 곧 ‘잡채’다. 잡채(雜菜)는 ‘여러 가지 나물 모둠’이다. 잡채에 넣는 당면(唐麪)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 땅에서의 역사가 불과 100년이다. 일제강점기 중국, 일본인들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 당면이다. 예전 잡채에 당면이 들어갔을 리 만무하다.




잡채의 주인공은 산나물, 들나물이다.
당면이 아니다.


나물, 산나물은 비빔밥, 잡채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나물은, 그래서, 한식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식의 나물, 산나물이 오늘날 같이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나물, 산나물을 정확히 모르고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모르니 애정이 없고, 애정이 없으니 더더욱 모르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나물을 모르니 외국 사람에게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결국, 나물, 산나물을 우리의 귀한 식문화로 여기지 않고 그저 ‘풀때기’ 정도로 비하한다.




나물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유독 한식에 대한 불평이 심하다. 대학가 주변의 식당 주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 유학생들은 한식 밥상의 반찬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 “밥상에 먹을 게 없다”
😣 “밥상에 김치를 비롯한 풀(?)밖에 없다”


한식의 특징을 모르니, 서슴지 않고 불평한다.

🤷‍♀️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할 나라라는데
정작 밥상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참 가난하게 산다”


중국인들에게 각종 나물 반찬, 김치 등은 반찬이 아니다. 그야말로 그저 ‘풀때기’다. 반찬의 종류에서 이런 나물, 김치 등은 모두 제외한다. 채소 반찬은 반찬이 아니다. 그저 풀이다. 나물이나 김치를 빼고 나면 한식 밥상이 휑해진다. 중국 유학생들이 불평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버섯 정도를 제외하면, 산에서 나는 ‘풀’은 먹지 않는다. 자신들이 먹지 않는, 못 먹는다고 생각하는 야생의 풀을 한국 사람들이 먹는다. 못 먹는 풀을 먹는 한국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나물은, 특히 산나물은 한국 고유의 음식 문화다. 세상 어떤 나라도 다양한 산나물을 우리처럼 먹지 않는다.

독일인들이 산마늘로 패스토를 만들고, 중국인들이 고들빼기류를 먹는 것이 오히려 특이하다. 일본인들도 고사리, 고비 등 몇 종류의 산나물만 먹는다. 우리처럼 취나물 한 종류만 하더라도 취나물, 곰취, 병풍취, 개미취, 미역취, 수리취 등으로 다양하게 먹는 민족은 없다. 산나물의 ‘떼루아’를 따지고, 지역마다 자연산 산나물이 나오는 계절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나물, 풀때기가 아니다


오늘날 산나물은 왜 천대받고 있을까?

“먹고 살기 어려워서
산의 나물이라도 뜯어 먹다가 생긴 습관”
'초근목피(草根木皮)’


왜 산나물을 이야기하면 이런 표현이 등장할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나물 문화는 우리 시대가 이전보다 더 후진적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관대작, 궁궐에서 나물 선물을 주고받았다. 우리보다 더 많은 종류의 나물을 먹었고, 흔하지만 귀하게 여겼다. 가난하게 살아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연장하려고 먹었던 풀때기가 아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의 나물 문화는 심하게 일그러진다.

일제강점기, 나물, 산나물의 ‘폭망’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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