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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 인문학 전문가

설렁탕=선농단, 사실이 아닌 이유는?! : 곰탕&설렁탕 이야기 3편

2023.04.26



 곰탕&설렁탕 이야기 3편 

: 설렁탕=선농단, 사실이 아닌 이유는?!




곰탕과 설렁탕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중에서는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먼저, 곰탕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 몇 가지를 교정하겠다.




곰탕과 설렁탕은 귀한 음식이다

“곰탕, 설렁탕은 모두 서민의 음식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곰탕은 고귀한 음식 중 하나로, 서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 양반의 비율이 10%대였다면, 곰탕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도 10%대였다는 뜻이다.

곰탕은 고기와 국물이 결합한 음식이기 때문에 곰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고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대부분의 인구가 소고기를 접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곰탕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도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



소고기 문화는 몽골인들의 것이 아니다

인터넷 등에서 설명하는 곰탕에 대한 내용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며 중구난방이다.

"몽골인들에 의해서 소고기 문화가 전래되었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한반도에는 몽골 침략 이전부터 소, 말, 돼지 등을 먹는 문화가 있었다. 이는 몽골이 침략하기 한참 전인 거란족의 한반도 침략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거란족을 따라 들어온 북방, 수렵 부족, 기마민족 등이 길잡이를 하며 소 등의 동물을 도축하며 먹었다.

물론 한반도에 들어온 몽골족들도 육식 문화와 동물 도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조선 초기 문신 양성지는

"거란족의 고려 침략 당시 침략군의 앞잡이를 했던 이민족들이 고려 영토 내에 남아 있다가 산속에서 무리 지어 살면서 고기를 도축하고, 도적질 등을 한다. 이들을 양척, 화수척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척, 화수척 등은 세월이 지나 백정이 된다.




몽골족의 고려 침략과 소고기 문화, 곰탕 등을 연결 짓는 것도 옳지 않다.

몽골인들은 '슈루'라는 뼈, 고기 등을 넣고 끓인 국물 음식을 먹었는데 이것은 한자어로 '공탕(空湯)'이라고도 불린다.

'곰탕'은 '공탕'에서, '설렁'은 '슈루'에서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틀린 주장이다.


거란족이나 몽골족은 북방 초원지대에서 생활하는 기마민족이다. 몽골족의 고기는 말고기나 양고기이며, 소고기는 아니다. 🐑

전쟁터에 가져가는 고기는 살아 있는 말이나 미리 도축하여 말린 말고기다. 몽골족들은 전쟁터에서 꼭 필요한 말을 기르고 관리했다.

이들은 초원지대를 떠돌며 양을 도축하고, 양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몽골족은 벼농사 등 농사를 짓는 민족이 아니므로 소가 흔했을 리 없다.


'곰탕=대갱'에 대한 기록은 매우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대갱은 우리 상상을 넘어서는, 오래된 음식이다.



선농단 이야기

설렁탕도 여러 가지 엉터리 ‘스토리텔링’과 얽혀 있다. 설렁탕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는 곰탕보다 더 심각하다.

가장 먼저 ‘선농단에서 설렁탕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이 ‘선농단=설렁탕은 틀렸다’고 알고 있지만, 여전히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


📜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조선 시대에 대단한 성군이 계셨는데, 어느 해인가 선농단에 선농제를 모시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왕은 선농제에 사용한 고기 등으로 국을 끓여 선농제에 참석한 백성들과 나눠 먹었다. 선농단에서 시작된 음식이라서 선농탕, 설농탕, 설렁탕이 되었다.





이야기에 포함된 수많은 오류들

이 ‘동화’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으며, 이야기 속의 ‘대단한 성군’은 대부분 세종대왕이라고 추정된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모신 기록은 있지만, 비를 만나고 설렁탕을 나눠 먹었다는 내용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가 외부 행사를 하다가 천재지변이나 사건을 당하면 ‘지휘관 정위치’가 원칙이다. 왕은 왕궁으로 빨리 돌아와야 한다.

왕이 비를 맞지 않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비가 오면 빨리 궁궐로 돌아와서 폭우나 홍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지의 주민들과 국밥을 끓여 먹는 것은 동화다. 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


곰탕이든 설렁탕이든 국밥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번거로운 일이다.

준비 없는 상황에서 가마솥을 걸고 국밥을 끓이는 것은 쉽지 않다. 가마솥도 없었을 것이다. 100명 정도의 국밥을 마련하더라도 큰 가마솥이 필요하다. 🥘 

핏물을 언제 뺄 것이며 장작은 누가 준비할까? 비가 오는데 장작불을 피우고 국을 끓였다? 게다가 최소 4~5시간이 걸린다. 쉽지 않다. 가스도 물론 없었고, 국밥용 그릇도 없다.

그 많은 그릇은 어디서 구할까? 선농단의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 국밥을 끓여 나눠 먹었다면, 국밥을 담을 그릇이 없다는 이유로라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에는 계급사회였고, 반상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왕족은 일반 백성들과 식사하지 않았으며, 각자 독립적으로 식사를 하였다. 모든 밥상은 독상인 원칙이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 도령도 잔칫날에는 혼자 개다리소반을 받았으며,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의 환갑날 아침 밥상을 차렸을 때도 독상이었다.

오늘날 사용하는 크고 화려한 교자상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술집 요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

 

만약 100명의 시골 주민이 설렁탕을 먹는다면, 국그릇뿐만 아니라 밥상도 100개가 필요하다.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설렁탕=선농단’이라는 이야기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백성을 깊이 사랑하는 성군이 있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설렁탕과 발음이 비슷한 선농단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로 추측된다. 📚



설렁탕, 발명이 아닌 발견

조선 시대에는 설렁탕이 드물었을 것이다. 소를 도축하는 일이 많지 않았으며, 냉장, 냉동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도축한 후 즉시 소를 처리해야 했다. 🥩

사골, 뼈, 피, 내장 등과 같은 부산물은 쉽게 상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고 도축한 사람과 인근 사람들이 소비했을 것이다.

설렁탕은 존재했지만 이름이 있는 공식적인 음식이 아니었으며, 일반적으로 찾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에 설렁탕이 널리 유행한 이유는 설렁탕 상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조금씩 소비되던 설렁탕이, 새로운 식당들의 주력 메뉴로 등장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있던 추어탕이나 해장국도 마찬가지다. 이전부터 있던 음식이 가게의 메뉴로 등장하면서 유행, 히트 아이템이 되었다. ⭐️





음식인문학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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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반 세기나 먼저 만들어진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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