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홈
외식업
황광해
음식 인문학 전문가

반 세기나 먼저 만들어진 설렁탕?! : 곰탕&설렁탕 이야기 2편

2023.04.20

 곰탕&설렁탕 이야기 2편 

: 반 세기나 먼저 만들어진 설렁탕?!



🥘 지금도 성공 중인 최초의 곰탕집 'ㅎ'은 1949년 문을 열었다.

그 이전에도 곰탕집이 있었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오래된 노포 곰탕집은 'ㅎ'이다. 'ㅎ'은 지금 을지로 입구인 수하동에서 시작해 명동으로 옮겼다.


한국전쟁 한 해 전인 1949년, 수하동 'ㅎ'을 창업한 사람은 인쇄소를 경영하던 김용택 씨다.

김용택 씨는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어서' 곰탕집을 열었다. 해방 직후,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김용택 씨는 '먹고 살려고' 곰탕집을 연 것이다.

김용택 씨의 막내아들 김희중 씨는 어느 신문 회고 칼럼을 통해 곰탕집 'ㅎ'의 창업 비화를 정확하게 밝혔다.

김용택 씨는 자녀들과의 약속대로 자녀들이 학교를 졸업하자 1964년 'ㅎ'의 문을 닫았다.

현재 'ㅎ'을 물려받은 사람은 김용택 씨의 친구인 장낙항 씨다. 'ㅎ'이라는 간판을 달고 곰탕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모두 장낙항 씨의 가족이다.


곰탕집의 시작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곰탕, 설렁탕의 창업 시기 차이곰탕과 설렁탕의 차이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설렁탕 1903년, 곰탕 1949

설렁탕집 중 가장 오래된 집은 1903년 무렵 문을 연 'ㅇ'이다. 노포 곰탕집은 노포 설렁탕집보다 반 세기가량 늦었다.

설렁탕 노포는 대부분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 그 당시 곰탕집을 드물고, 설렁탕집은 흔했다는 뜻이다.


🎞 <야인시대> 전설적인 주먹 김두한 일행들이 ‘우미관’ 부근에서 먹었던 음식도 설렁탕이고,
📚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 첨지가 병석에 있는 아내를 위해 마련한 음식도 설렁탕이다.


설렁탕은 예전에도 지금에도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설렁탕의 원형

언론인 홍승면 씨(1927~1983년)는 수필집 '백미백상'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의 설렁탕에 대해 설명한다.

시장통을 지나는데 설렁탕집에서 소 머리를 여러 개 쌓아 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였고, 이후로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당시의 설렁탕은 사골뿐만 아니라 소 머리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곰탕과 설렁탕의 차이는 간단하다.

🥩 살코기를 사용한 경우에는 곰탕,

🦴 부산물로 생산된 뼈, 소머리, 내장, 선지 등을 넣고 끓인 국물은 설렁탕이다.


설렁탕은 정육을 제외한 여러 종류의 고기 부산물을 사용하여 끓인 국물을 말한다. 국물에는 선지, 내장 등도 넣을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선지해장국, 내장 해장국으로 변화한다.


노포 설렁탕집 'ㅇ'에서는 현재도 설렁탕 국물 위에 '마나'를 올려준다. 마나는 소의 지라(비장)이다. 

설렁탕집은 뼈로 끓이는 국물인 설렁탕을 만들 때 지라와 같은 내장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지라는 피가 많은 부위이며, 고소한 맛보다는 고기와 피의 비린 맛이 강하다. '마나'는 맛보다는 전통적이고 원형의 설렁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계를 넘지 않는 곰탕과 설렁탕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먹히는 소머리 국과 소머리해장국살을 떼기 어려운 소 대가리 부위의 뼈를 사용해 국물을 우려내고, 뼈 사이에 붙어 있는 살코기를 발라 국물을 더한 것이다.

소머리 국과 소머리해장국은 결국 설렁탕에서 시작한 음식으로, 설렁탕은 여러 뼈와 소의 부산물로 만든 국물이다. 🐂

 

특히 소 대가리는 국물에 단맛을 강하게 내는 재료이다. 소머리해장국은 설렁탕의 여러 재료 중에서 특정 부위를 강조해 만든 음식인데 내장이나 소 대가리의 살코기 등을 더한 설렁탕이다.

현재는 양지나 우둔살의 여러 부위도 추가하여 만들어진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변화, 발전한 퓨전 곰탕과 설렁탕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곰탕설렁탕서로 좋은 점을 취하여 만들어졌다. 🤝

 

그러나 두 음식 모두 참 재미있게도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설렁탕은 일반적으로 곰탕보다 가격이 낮다. 이는 설렁탕이 서민의 음식이고 곰탕제사 음식으로 출발한 반가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고기는 귀하고 고기를 재료로 시중에 판매하는 음식을 만들 수는 없다. 곰탕은 제사에 사용될 만큼 귀한 음식으로, 함부로 저렴하게 판매할 수 없다.

이것이 곰탕가격이 항상 높은 이유이며, 곰탕이 설렁탕보다 나중에 등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설렁탕의 기원

설렁탕주막과 시장에서 소박하게 제공되던 음식이었다.

홍승면 작가의 추억처럼, 시장에서는 한 차례 소고기 대신 허연 소 대가리 뼈를 넣어 푸짐한 국물로 끓여서 내놓던 음식이다.

그 당시에는 고기가 귀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에 소를 도축하면서 얻은 살코기는 비싸고 값어치가 높았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축 소고기가 관청으로 납품되었다.

민간에서는 소고기를 거래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소를 도축하는 것은 불법행위였다. 👮🏻‍♂️

 

따라서 그 시대의 주막에서는 소나 돼지 대신에 개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었다. 가마솥에서 끓이는 고깃국물 대부분이 개고기였고, 이에 된장, 시래기, 푸성귀를 더해 개장국을 만들어 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국물이 육개장이 등장했다. 육개장은 '소고기 + 개장국'의 조합이다. 개장국을 소고기로 끓여서 만든 음식이 육개장이다.

 

한국인의 국물 음식은 뿌리가 깊다. 

설렁탕, 곰탕, 해장국 및 또 다른 국물 음식도 마찬가지다. 이미 오래전에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다. 📝

 

대갱(大羹)은 소금, 채소 등으로 가미하지 않은 고깃국(肉汁, 육즙)이다. 

화갱(和羹) 소금, 채소 등으로 가미한 국이다. 한편, 모활(芼滑)은 고명이다. 맛을 내기 위해 넣는 채소나 고기붙이 등이다.

<경모궁의궤_설찬도설>





음식인문학 전문가
 황광해 의 곰탕&설렁탕 이야기 보러가기

👉🏻1편: 곰탕과 설렁탕은 어떻게 다른가요?






댓글 0
최신순
오래된순
사장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