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이야기 2편
: 비빔밥은 참여예술이다!
🔗비빔밥 이야기 1편에서는 비빔밥과 백남준,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았다.
비빔밥은 어떤 음식인가?
다시,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1993년 7월, 한국일보에 “비빔밥 정신과 대전엑스포93”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대전엑스포’와 관련한 칼럼이었다.
(전략) 대전 엑스포 현장을 거닐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의 비빔밥 문화입니다. 즉,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대 전자문명에서 필요한 것은 혼합매체(Mix Media) 정신으로 명쾌한 해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는 멀티미디어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빔밥 정신이 바로 멀티미디어에 대응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은 복잡한 상황을 적절하게 해결하고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잡한 상황이 바로 비빔밥이죠. 프랑스 비평가 장 폴 파르지 역시 한국의 또는 백남준의 심볼은 비빔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비빔밥 정신이 있다면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 비빔밥은 참여 예술입니다. 다른 요리와는 달리 손으로 직접 섞어 먹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비빔밥 문화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알맞은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매체의 세계에서 제일 덕을 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가 될 것입니다. (후략) |
한식뿐만 아니라 비빔밥에 대한 설명으로도 탁월하다. 한식과 비빔밥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3의 맛을 찾는다.
먹는 사람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내는 ‘참여 예술’이다.🎨
한식 밥상은 한상차림으로, 큰 밥상에 여러 가지 반찬을 차린다. 어떤 반찬을, 어떤 순서로 얼마만큼 먹는지는 정해져 있지않다. 소비자가 순서, 양, 방식을 정한다.
한상차림 밥상은 멀티미디어와도 같다. 한국 사람들은 복잡한 밥상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비빔밥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써야 할, 정해진 재료도 없고 조리법도 없다. 무작위적이다. 🤹♀
비빔밥은 참여 예술이다. 밥과 재료를 주면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만든다. 한민족은 누구나 각자 자기만의 맛있는 비빔밥이 따로 있다.
먹는 사람이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독특한 음식이다. 여러 가지 반찬을 늘어놓고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먹는 한식의 한상차림 밥상과 닮았다.
비빔밥을 골동반이라 부른 이유
비빔밥을 ‘골동반(骨董飯)’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 잘 된 선택은 아니었다.
비빔밥은 조선 시대 후기부터 '골동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비빔밥의 예전 표기는 골동반"으로 여겨진다. 비빔밥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왜 비빔밥을 억지스럽게 골동반이라고 표기했을까? 🤔
중국 측 기록에 '골동', '골동반'이라는 표기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골동'은 오래된 물건을 두서없이 모아둔 모습이라는 뜻이다.
정조 7년(1783년) 7월, 공조 판서 정민시의 상소문에 ‘골동’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드러난다. ”정조실록“의 내용이다.
(전략)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도 (중략) 어둡고 어지러워져 그만 허위가 판을 치는 골동반(骨董飯)과 같은 세상이라, 청의(淸議)에 죄를 얻어도 구애(拘碍)될 것이 없고, (후략) |
공조 판서 정민시는 당시 도덕, 기강이 무너진 사회가 골동반 같이 뒤섞인, 허위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고 설명한다.
정리가 되지 않고, 앞뒤, 아래, 위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사회가 ‘골동반 같은 사회’다.
골동, 골동반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골동이 이러할진대 혼돈, 혼돈반은 더욱더 부정적인 의미로 여겼을 것이다.
골동이라고 표기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미 중국 측 기록에 골동반(骨董飯, 비빔밥), 골동갱(骨董羹, 여러 가지를 넣고 끓인 국물), 골동(骨董)이 있었다.
중국에서 먼저 사용한 단어이니 조선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빔밥과 골동반은 다르다
골동반과 비빔밥은 서로 다른 음식이다. 중국 측 기록인 '이언해(俚言解)'에 따르면,
생선, 고기 등 여러 가지를 (솥에) 넣고 지은 밥을 '골동반'이라 한다 ('以魚肉諸物埋飯中, 謂之骨董飯(이어육제물매반중 위지골동반)'). |
'이언해'는 그 시대에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와 어원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언해'의 편찬자 진사원(陈士元, 1516~1597년)은 16세기 사람으로 조선에서 중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골동반'과 '골동'이란 단어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문어와 구어를 동시에 사용했다.
민간에서는 비빔밥을 한글로 불렀고, 문서에는 한자로 '骨董飯(골동반)'이라고 표기했다.
이후 한자 표기가 '渾沌飯(혼돈반)'에서 '骨董飯(골동반)'으로 바뀌었다. 비빔밥이 중국의 '골동반'과 닮았기 때문에 '골동반'이라고 표기되었다.
골동반은 채소, 고기, 해물 등을 미리 솥에 넣고 곡물을 넣은 후에 지은 밥이다.
굳이 비슷한 음식을 찾자면 영양솥밥과 닮았다.
여러 식재료와 쌀을 같은 솥에 안치고 밥을 짓는다. 영양이 좋은 곡물이나 고기, 생선 등을 사용하여 돌솥 등으로 만드는 영양솥밥일 뿐이다.
일본의 가마메시 역시 같은 방식이다. 해물, 채소, 고기류 등을 쌀과 같이 안치고 한 그릇씩 밥을 짓는다.
골동반과 일본 가마메시, 우리의 영양솥밥은 닮았다.
분명히 비빔밥과는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의 콩나물밥, 무밥이 골동반과 닮았다. 콩나물 혹은 무나물을 올려서 밥을 지으면 콩나물밥, 무밥이다.
그러나 콩나물 비빔밥과 콩나물 밥은 다르고, 무나물 비빔밥과 무밥은 다르다.
콩나물밥과 무밥은 콩나물, 무나물의 양이 정해져 있다. 먹는 이가 더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
일본 가마메시는 밥을 지은 다음에도 비빔밥처럼 비비지 않는다.
콩나물 비빔밥은 섞고 비빈다. 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자유다
필자는 꽤 오랫동안 '제사 비빔밥'을 먹었다. 제사를 모시고 나면 큰 그릇을 하나씩 준다.
갓 지은 뜨듯한 밥을 그릇에 퍼담고 얼마 정도 식힌다.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 콩나물, 무나물을 원하는 대로 얹는다. 깨를 더한 조선간장을 얹어서 비벼 먹는다.
긴 나물이 질척거리면 가위 등으로 자르기도 한다. 잘 비벼지지 않으면 탕국물을 한 숟가락 더하기도 한다. 🍽️
한밤중에 먹는 비빔밥이 맛있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제사 모실 때를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제사보다 젯밥이었던 셈이다.
비빔밥은 섞고 비비는 것이다.
시금치가 아주 맛이 없는 늦여름, 초가을에는 시금치 대신 열무나물을 내놓기도 했다. 비빔밥의 나물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 계절에 나오는 것 중, 음식을 준비하는 이가 정성으로 준비한다.
집집마다 나름의 '맛있는 조리법'이 따로 있다. 고추장을 넣어도 되지만, 필자는 간장으로 비벼 먹는 간장 비빔밥이 좋았다. 😋
다 비벼갈 무렵, 구운 김이나 다시마 부각 등을 가루 내어 올렸다. 천연 조미료였다.
비빔밥은 자유다. 어느 나물을, 어느 정도 넣을는지 혹은 어떻게 비빌는지는 먹는 이가 정한다.
무한대의 비빔밥 종류
비빔밥의 종류는 무한대다.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여러 종류의 비빔밥이 나타난다.
“비빔밥, 채소 비빔밥, 평양 것을 으뜸으로 친다. 다른 비빔밥으로는 갈치, 준치, 숭어 등에 겨자 장을 넣은 비빔밥, 구운 새끼 전어를 넣은 비빔밥, 큰 새우 말린 것, 작은 새우, 쌀 새우를 넣은 비빔밥, 황주(황해도)의 작은 새우젓갈 비빔밥, 새우 알 비빔밥, 게장 비빔밥, 달래 비빔밥, 생호과 비빔밥, 기름 발라 구운 김 가루 비빔밥, 미초장 비빔밥, 볶은 콩 비빔밥 등이 있다. 사람들 모두 좋아하고 진미로 여긴다. |
새우 하나라도 여러 종류의 비빔밥이 나온다. 새우 날 것, 말린 것, 젓갈, 알이 모두 가능하다. 화려하다.
미하(米蝦)’는 쌀 새우다. 쌀알만큼 작은 새우라서 붙인, 낭만적인 이름이다. 게장 비빔밥은 지금도 있다. 채소도 여러 종류고 젓갈, 김 가루, 볶은 콩으로도 비빔밥은 가능하다.
열무김치를 넣어도 좋고, 날 상추를 찢어 넣어도 좋다. 갈치, 준치, 숭어 등과 겨자장을 넣은 것은 오늘날 회 비빔밥과 닮았다. 겨자장 대신 초고추장으로 바뀌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비빔밥을 보면 오늘날 비빔밥은 오히려 퇴보했다. 다양성, 자유로움이 사라지고 비빔밥의 정신도 잃었다.
비빔밥의 정신을 살리고, 맛있는, 한식을 제대로 보여주는 비빔밥을 기대한다. 🙏